프롤로그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기억은 조각나 파편이 되기 마련이다. 그런 조각난 파편들 속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조각들이 있다. 흔히 추억이라 불리는, 그런 조각들 말이다. 손을 뻗어 붙잡은 추억 두 조각이, 한여름 밤의 별빛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몇 광년은 족히 떨어져 있을 두 별처럼 아득하면서도, 한쪽에서 손을 뻗으면 금세 닿을 것만 같은 그 추억의 조각들이. 내 안에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1장 본격적으로 무더위가 시작되려는지, 그날의 하굣길은 유난스럽게도 더웠다. 유미: “맛있다아아아~~” 한 손으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려는데, 옆에서는 무더위 따위는 잊은 듯한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순간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내 클래스메이트 유미. 언제나 활기가 가득하다 못해 넘쳐버릴 것 같은 그녀는 날아갈 듯한 얼굴로 방금 산 크레페를 크게 한 입 베어 문 뒤였다. 유미: “있지, 여기서 파는 크레페는 특히 더 맛있는 것 같아. 그렇지 않아?” 나에게 긍정을 강요하는 듯한 단정적인 목소리. 나: “으응, 그러게. 맛있는 것 같아.” 진심이 반 정도 섞인 형식적인 대답과 함께, 나도 크레페를 한 입 베어 먹었다. 새콤한 딸기 과즙과 달콤한 초코 시럽이 입안에서 뒤섞여 녹아내린다. 너무나도 진짜 같아서 오히려 인공적인 느낌이 물씬 드는 맛. 역시 맛있으니 된 걸까, 라고 생각하며 나는 크레페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맛있다. 오랜만에 크레페를 맛보는 내 뇌가 내린 결론이었다. 유미: “게다가 오랜만에 먹어서 그런가, 더 맛있는 것 같아.” 유미: “하아아…… 크레페라면 안 질리고 매일매일 먹을 수 있는데…….” 나: “그러고 보니 같이 디저트 가게 들른 것도 오랜만이네.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유미: “아, 하하…… 그게…….”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유미. 뭐지? 나한테 미처 이야기 못한 일이라도 있었던 건가? 나는 유미의 당황스러워 하는 보기 드문 모습을 바라보며 크레페를 한 입 베어 물려던 참이었다. 유미: “있지, 나 요즘 살 조금 찐 거 같지 않아?” 나: “쿠흡, 켁, 쿨럭……. 뭐야, 그런 걸 나한테 갑자기 왜 물어?” 하마터면 체할 뻔 했다. 요즘들어 디저트 가게에 발이 뜸했던 건, 다이어트 때문이었나. 유미: “으응? 그거야 당연히, 지금은 너 말곤 대답해줄 사람이 없잖아?” 나: “아니…… 그게 아니라…….” 얼굴에 난감한 티를 잔뜩 묻힌 채, 나는 쭈뼛쭈뼛 유미를 훑어보았다. 몇 달 전에도 이런 함정 질문에 걸려서 ‘그러게. 조금 찐 것 같아.’라고 생각 없이 대답했다가 며칠 동안 시달렸었지. 그렇다고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는 건 아니었기에, 나는 유미를 멀뚱멀뚱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금이라도 좋으니 이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하지 않을래, 라는 의미였지만. 질문을 철회해달라는 무언의 요구는 역시나 씨알도 먹히지 않는 듯해 보였다. 나: “음, 그게…….” 혀끝을 벗어난 언어의 조각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녀를 향해 날아간다. 나: “나, 나는 오히려 살 조금 찐 쪽이 더 예뻐 보이는데.” …… 뭐라는 거야. 황급히 고개를 반대편으로 틀려는데, 옆에서 당황스러움의 농도가 한층 더 짙어진 유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미: “지, 지금 네 취향 물어본 게 아니잖아?!” 생각 없이 내뱉은 한 마디였는데, 의외로 효과만점이었다. 자신의 늘어난 몸무게에 대해 잠깐 투정을 부리던 유미는 곧바로 다른 화제로 방향을 돌렸다. 유미: “그나저나, 곧 여름 방학이잖아.” 나: “으응, 그렇지.” 뭘 했다고 벌써 여름 방학인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느 새 1년 하고도 6개월에, 두 번째 여름 방학인가. 유미: “넌 여름 방학때 뭐 할 거야?” 나: “글쎄……. 아직 생각해 둔 건 없는데.” 지난 방학땐 정말 여러모로 바빴었는데. 하지만 이번 여름 방학은…… 잘 모르겠다. 나: “넌 계획해둔 거라도 있어?” 유미: “난 이번 여름 방학은 후배들 멘토링이나 봉사활동 쪽으로 계획을 잡고 있어. 아 참, 그리고 방학 끝나고 있을 학예제 준비도 해야 하고.” 나: “너 다운 계획이네.” 하긴, 유미라면 분명 계획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유미: “이번 여름 방학이 아니면 이젠 봉사활동 할 시간도 없을 것 같아서.” 나: “음, 그렇겠네.” 정말 유미답다고 할 수 있는 미래 지향적인 계획이다. 크레페를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크림이 녹아내리고, 달콤한 향이 입안 가득 퍼진다. 생각에 잠기게 하는, 진한 달콤함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나: ‘…… 어려운 고민이네.’ 아마 이 세상 그 누구도 이런 고민은 해 본 적 없겠지. 유미: “생각해둔 게 없으면 나랑 같이 봉사활동이라도 가 보는 건 어때?” 나: “봉사활동……? 그것도 괜찮겠다. 생각 한번 해볼게.” 유미: “너도 이제 슬슬 대학 진학 걱정 해야 할 시기라고.” 나: “하긴, 그것도 그렇지.” 유미: “너, 너무 안일하게 생각하는 거 아냐?” 유미와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항상 그녀가 나를 미래로 인도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유미는 멍하니 생각에 잠겨있는 나를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속으로 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이젠 발걸음을 떼어야 하는 시간인걸까. 유미: “아, 참. 주말에 이번 학기 성적표 받지 않았어?” 나: “으응, 받았어. 토요일쯤 받았던 거 같은데.” 유미: “결과는? 어떻게 나왔어?” 나: “50등 정도였나…….” 유미: “와, 정말? 많이 올랐네. 작년 2학기까지만 해도 아슬아슬하게 두 자리 등수였잖아.” 나: “네 덕분이지 뭐.” 유미: “하긴, 그렇지?!” 빈말은 아니었지만, 유미는 내 말에 생각보다도 강한 긍정을 보이며 키득였다. 유미: “뿌듯한데? 내가 가르친 학생 성적이 그렇게 올랐다니까.” 나: “네에, 네. 감사합니다, 유미 선생님.” 한껏 기분이 업된 듯한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쳐 준다. 매일같이 유미가 나한테 신경을 써 줘서 성적이 오른 건 분명한 사실이었으니까. 겨울방학 때 무척이나 바빴던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거였고 말이다. 유미: “캬캬, 그렇지? 그렇지?!” 유미는 정말 제자를 보는 스승처럼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유미: “그럼, 다음 학기에도 성적이 올라서 30등 안에 들어가면, 겨울방학 때 나랑 같이 여행이라도 가 보는 건 어떨까?” 나: “여행……?” 유미: “응, 여행. 3학년 되기 전에 리프레쉬라도 할 겸.” 나: “그것도 좋지…… 잠깐, 너랑 나랑 둘이서……?” 유미: “응, 둘이서. 왜? 싫어?” 나: “아, 아니. 싫은 건 아닌데.” 싫다기보다는, 단둘이서 여행이라니. 그건 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복잡한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마구 솟아났다. 유미: “설마 나쁜 생각이라도 한 거야?” 나: “그건 절대 아니거든.” 유미: “흐음…….” 내 눈에 뭐가 쓰여있기라도 한 건지, 유미는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유미: “뭐, 그 이야기는 나중에 성적 나오면 더 하는 걸로 하자~” 유미는 자신의 고조된 기분을 숨길 생각은 없었는지 가벼운 허밍과 함께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겼다. 유미의 손에 들려있던 크레페는 그새 어디로 사라진 건지 자취를 감춘 뒤였다. 어렴풋이 남은 달콤한 향만이 크레페가 존재했음을 알려줄 뿐. 나는 반쯤 남은 크레페를 우물거리며 그녀의 옆을 걸었다. 유미: “아, 참. 동아리 활동은 잘 돼 가?” 나: “으응, 뭐. 그럭저럭.” 유미: “너, 방학때 동아리 활동 보고서 완전 잘 적어서 내야 한다? 내가 거기 유령 부원 꽂아 주려고 얼마나 고생했는데.” 나: “알겠어. 걱정 안 해도 돼.” 유미: “정말이지? 믿는다?” 유미가 문득 생각난 게 있다며 꺼낸 이야기는 다름 아닌 내 동아리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속한 동아리는 오컬트부. 현대 과학 기술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현상을 연구하는 동아리…… 라고 일단은 알려져 있다. 유미: “그런데 오컬트부라니…… 요즘 같은 시대에 오컬트가 웬 말이야.” 나: “왜. 유령 부원뿐인 오컬트 부라니, 이 정도면 충분히 오컬트부스럽지 않아?” 유미: “뭐야, 그 썰렁한 농담은.” 아까 전의 웃음기 넘치던 목소리는 어디로 가고, 물을 잔뜩 끼얹은 듯한 무거운 목소리가 대답으로 들려왔다. 내가 속한 오컬트부는 부원이 나를 포함해 일곱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소규모 동아리다. 뭐, 이마저도 두 명을 제외한 나머지 부원이 모두 유령 부원인 허울뿐인 동아리지만 말이다. 허울 뿐인 오컬트부가 명목을 유지할 수 있는 건 학생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유미의 공이 컸다. 부회장인 유미가 사람을 구해 유령 부원을 어찌어찌 구해 학생부에 제출해 줬으니까……. 정말, 유미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 했나 모르겠다. 크레페를 다 먹고는, 나는 버릇처럼 손에 묻어있던 슈가 파우더를 후우 불어 바람에 날려 보냈다. 밋밋한 단내가 송진 가루처럼 흩날린다. 물론 여기서는 소나무는커녕 관목 한 그루조차 볼 수 없지만 말이다. 횡단보도 앞에 서자,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던 관목도, 여름이면 지겹도록 들을 수 있었던 매미들의 울음소리도 이곳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빈자리는 도로변에 솟아있는 태양광 패널과, 안내로봇이나 순찰로봇들이 거리를 돌아다니며 내는 삐빅거리는 소리가 대신한다. 크레페에 잔뜩 들어있던 새콤한 딸기도, 달콤한 초콜릿도, 분명 어느 실험실 배양 접시 위에서 만들어진 것이겠지. 어디를 둘러보든, 내리쬐는 태양을 제외하면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인조미에 물든 세상. 이 세계를 단번에 압축하는 말이다. 유미: “후, 그나저나 오늘따라 너무 더운 것 같아.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옆에서는 더위에 못 이겨 투정을 부리는 유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미도 더위를 타는지, 자신의 교복 셔츠를 연거푸 팔랑였다. 나: “다이어트 한다며.” 유미: “이 정도 땀 흘렸으면 살도 빠지지 않았을까?” 나: “…….” 과학도 잘한다는 애가 왜 이럴 때만큼은 이성적이지 못한 걸까. 신호가 바뀌고, 나와 유미는 건너편 길목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매끄럽게 포장된 횡단보도의 딱딱한 감촉이 발끝에 전해진다. 그때였다. 유미: “――――” 아스라이 멀어져가는 유미의 목소리.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는 내 옆을 스치듯 지나가는 한 소녀를 바라본다. 소녀: “…….” 중학생 정도로 되어 보이는 그 소녀는 땅속에 얼굴을 파묻기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소녀: “……?” 내 시선을 눈치챈 걸까. 조심스럽다는 말이 부족할 정도로 조심조심 고개를 든 소녀의 눈동자가 나와 마주친다. 유미: “야, 거기서 혼자 뭐해―” 횡단보도 저편에서 유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소녀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소녀: “………….” 잠시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소녀의 눈동자가 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던 소녀는 돌연 나와는 반대 방향으로 급히 뛰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누군가가 내 손목을 붙잡았다. 유미: “여기서 뭐해?! 이러다 신호 바뀌겠어.” 유미였다. 나의 손목을 붙잡은 유미는 나를 거의 끌고가다시피하며 반대편 건널목까지 뛰어갔다. 아슬아슬하게 신호가 바뀌고, 가느다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유미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유미: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던 거야? 갑자기 횡단보도에서 멈춰 서서는…….” 나: “아, 하핫…… 미안, 미안.” 유미: “흐음…….” 멋쩍은 웃음으로 상황을 넘어가려던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유미. 유미는 정말 내 얼굴에 구멍이라도 뚫을 기세로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유미: “혹시 지나가는 길에 네 이상형이라도 본 거야?” 나: “으응? 아, 아냐. 그럴 리가.” 유미: “거짓말. 분명 뭐에 홀린 것 같은 얼굴이었거든?” 유미의 날카로운 눈빛에서 찌릿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러다 감전사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릿지릿한 눈빛이었다. 유미: “…… 어쨌거나, 조심해. 또 호버크라프트에 치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나: “알겠어, 알겠어. 앞으론 조심할게.” 유미의 날카로웠던 눈매가 다시금 원래 모습을 되찾는다. 유미의 걱정 어린 말에, 나는 연신 미안한 티를 낼 수밖엔 없었다. 유미: “그러고 보니, 그 일도 벌써 1년 넘게 지났네.” 나: “그러게. 엊그제 일 같은데.” 유미: “시간 참 빠르다, 그렇지?”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미가 말한 그 일이란, 나와 그녀가 처음 만난 그 날의 일을 의미했다. 어쩌면 내가 그날의 일을 엊그제 같다고 느끼는 것도, 그때의 일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유미와 내가 처음 만났던 그 날. 그날도 횡단보도 위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세상이 90도로 기울어져 있었다. 뺨에서는 차가우면서도 매끄러운 감촉이 전해졌다. 세상이 기울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길바닥에 넘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그곳에는 나에게 손을 내미는 한 여학생이 서 있었다. 그것이 유미와의 첫 만남이었지만, 그녀가 유미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조금 더 뒤의 일이었다. 유미: “괜찮아? 다친 데는 없어?” 손을 내밀며 내게 안부를 묻는 그녀. 나는 얼떨결에 그녀의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나: “……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유미: “너, 지나가던 호버크라프트랑 부딪혔다구…….” 아니, 그걸 물은 게 아닌데. 상냥하게도, 그녀는 혼잣말처럼 내뱉은 내 말에 진지하게 대답을 해주었다. 유미: “정말 괜찮은 거 맞아? 많이 안 좋아 보이는데…….” 나: “아, 아냐. 멀쩡해. 가벼운 타박상인 거 같으니까.” 괜찮다는 말과 함께 감사 인사를 건네고는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오려 했는데. 주변을 둘러보던 나는 그만 발걸음을 다시 멈춰 세워야만 했다. 나: “…….” 이질감이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 여긴 도대체 어디지? 나: “으윽…….” 이질감은 풍경에서만 느껴지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나의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은 이질감이 온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잠시 동안, 내가 어쩌다 이곳에 있게 된 건지 기억을 더듬어 보려 했지만 어째서인지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 “저기…… 있잖아. 여긴 어디야?” 유미: “여기? 여긴 백석시 A구역이잖아. 그건 갑자기 왜?” 왜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나를 바라보는 여학생. 이윽고 그녀는 나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며 되물었다. 유미: “왜 그래? 뭐 이상한 거라도 있어?” 나: “아, 아무것도 아냐. 잠시 착각했나 봐. 도와줘서 정말 고마워!” 유미: “야, 야아! 어디 가!” 나를 붙잡으려는 목소리를 뒤로 한 채, 나는 급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나: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백석시 A구역이라니. 숨을 고르며 다시 생각해 봐도, 영문을 알 수 없는 대답이었다. 내가 있던 곳은 분명 백석시가 아니었던 건 물론이고, 더군다나 A구역이라니. 그런 도로명이 있었던가? 난데없는 복잡한 상황에, 버릇처럼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려던 나는 순간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더 발견할 수 있었다. 나: “…… 뭐야.” 나도 모르게, 놀랐다는 말로도 부족할 반응이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 꿈인가? 꿈이라면 분명 깨어나고 나서도 오랫동안 두고두고 기억 날 만한, 그런 꿈이겠지. 머리카락을 헝클려다 말고, 나는 내 몸을 살펴보았다. 가느다랗게 변한 손목과 내 것이 아닌 듯한 양손, 골격마저도 눈에 띄게 변해 있는 내 몸은, 아이러니하게도 내 몸이 내 몸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게다가 허벅지에서 느낀 이질감 섞인 통증은, 내게 지금의 상황이 꿈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고 말이다. 나: ‘몸이…… 바뀌기라도 한 건가?’ 마음속으로 그 짧은 시간 동안 '말도 안 돼'라는 말을 몇 번씩이나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적어도 수백 번은 중얼거렸지 않았을까. 이젠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진짜’ 나는 어떻게 된 걸까? 머릿속에서 툭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성적 사고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였을까. 그 뒤로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말 그대로 뇌 정지 상태. 나는 그만 생각을 멈추었다. 그때였다. 유미: “거기 있어?” 멀리서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리가 나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유미: “후아, 한참을 뛰었네……. 백석 고등학교는 그쪽이 아니라고.” 나: “으응……?” 백석 고등학교라고? 이 여학생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나는 분명 아직 중학교 3학년생일 텐데……. 유미: “너, 백석 고등학교 학생 아냐? 신입생 맞지?” 그녀는 내 어리둥절한 표정을 보고서는, 이상하다는 듯 재차 확인하려는 건지 질문을 건넸다. 내 뇌가 정지 상태에서 깨어난 건, 다행스럽게도 그때쯤의 일이었다. 주인이 바뀌었다는 걸, 뒤늦게나마 뇌가 눈치챈 것이었을까. 나: “으응, 맞는데.” 유미: “잘 됐다! 나도 백석 고등학교 신입생이거든. 내 이름은 유미라고 해.” 그녀의 교복에 달린 이름표가 골목길에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나의 교복과 그녀의 교복이 같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던 건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유미: “네 이름은 뭐야?” 나: “내 이름은 세…….” 이름을 꺼내려다 말고, 나는 내 교복에 달려있던 이름표를 흘깃 바라보았다. 유미: “세……?” 목소리를 삼킨 나는 명찰에 적힌 이름을 그녀에게 알려 주었다. 유미: “그렇구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잘 부탁해!” 유미라는 이름의 여학생은 다시 한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번엔 도움의 손길이 아닌, 내게 악수를 청하는 뜻의 손길이었다. 때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갈색 머리칼과 교복의 옷깃이 살랑살랑 흩날렸다. 무언가에 홀린 듯,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 “으응…… 잘 부탁해.” 얼떨결에 잘 부탁한다는 말을 건네긴 했지만, 진심이 담긴 건 아니었다. 마주 잡은 유미의 손은 마치 비단결을 만지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물론 지금의 내겐 가시 돋친 밤껍질을 만지는 것처럼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말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을 도무지 정리할 수가 없었다. 몸이 바뀌다니. 영화나 만화에서나 가능할 법한 이야기라며, 나는 여전히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내 불편한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를 백석 고등학교로 안내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나로서는 그녀를 잠자코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유미: “입학식이라니, 되게 두근거린다. 그렇지 않아?” …… 입학식이라고? 나는 유미의 말에 뭐라 반응을 보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멀뚱멀뚱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유미: “너, 입학식 날이라고 너무 긴장한 거 아냐?” 유미는 나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어깨를 쿡쿡 찔러댔다. 입학식 정도의 긴장감이라면 모르겠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자극으로 긴장이 풀릴 리는 없었다. 나: “그, 그런가……?” 유미: “응, 완전 긴장한 것 같아 보여.” 그렇구나. 오늘은 입학식 날이었구나. 나: “…….” 유미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내가 놓치고 있던 부분을 뒤늦게나마 눈치챌 수 있었다. 주변에는 여전히 겨울의 입김을 떨쳐내지 못한 듯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분명 나는 여름 방학이 다 끝나가고, 중학교에서의 마지막 학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텐데. 불어오는 쌀쌀한 바람과 유미라는 여학생이 말한 입학식이라는 단어가 새로운 사실 하나를 내게 알려준다. 단순히 몸만이 바뀐 것이 아니었다. 바뀐 것이다. 시간이 바뀐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학생이어야 했을 나는, 졸지에 시간 여행자이자 유체이탈의 경험자가 되어 있었다. 유미: “왜 그래?” 나: “아, 아냐. 정말 긴장했나 봐. 아, 하하하…….” 나는 당황스러운 티를 애써 억누르고는 최대한 아무 일도 없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을 직접 겪고 있는 나조차도 믿기지 않는데, 유미라고 다를까. 유미는 나의 멋쩍은 미소를 보더니, 전염이라도 된 듯 머쓱한 웃음을 입가에 띠었다. 유미: “그런 이야기 들으니까 나도 좀 긴장되네. 휴, 반 배정이라도 잘 됐으면 좋겠다.” 그녀는 소원을 빌듯, 하늘에 대고 말했다. 나: “…… 행운을 빌게.” 이번엔 내가 그녀의 혼잣말 같은 이야기에 반응을 보였다. 유미: “와아, 고마워. 너도 행운을 빌어!” 한쪽에선 빈 껍데기 같은 말이, 그리고 다른 한쪽에선 감정이 가득하다 못해 넘칠 것 같은 말이 오갔다. 확실히 불공정해 보이는 감정 교환이었다. 죄책감이라도 든 걸까, 왠지 심장이 무거운 기분이었다. 심장이 무거웠던 건, 아무래도 기분 탓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유미를 따라 학교로 향하던 중, 나는 뒤늦게나마 교복 안주머니에 들어있던 휴대용 태블릿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 “으음…….” 특이하게 생긴 태블릿이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디자인이 분명했다. 태블릿을 켜는 그 짤막한 순간 동안, 불안한 생각들이 자꾸만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3월 3일. 태블릿 잠금 화면의 위젯에 나타나 있는 오늘의 날짜였다. 내가 알지 못하는 대규모의 몰래카메라가 아니라면, 나는 분명 시간여행을 한 것이겠지. 시간여행과 유체이탈을 동시에 경험하는 것과 대규모의 몰래카메라 사이에서 일어날 확률이 더 높은 걸 고르라고 한다면 단연코 후자겠지만……. 인생은 항상 확률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법이다. 확실하지 않은 건, 내가 어느 시간대로 시간여행을 한 것인지였다. 태블릿의 잠금 화면에는 올해가 몇 년도인지는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잠금 화면을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현재의 시간과 날짜만을 표시하고 있던 잠금 화면이 저절로 해제되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 눈을 깜빡이다 말고, 잠금 화면이 해제된 것이 바로 이 눈동자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한번 내가 다른 사람의 몸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나저나, 이 태블릿에는 원래 주인의 정보나 이를 유추할 수 있는 것들도 제법 들어있을 텐데. 어쩌면 상황을 풀어나갈 만한 정보를 이 태블릿에서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나는 태블릿의 날짜 탭을 눌렀다. 유미: “여기야. 백석 고등학교.”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는데, 때마침 들려온 유미의 목소리가 이를 제지했다. 태블릿에서 눈을 떼고는, 나는 고개를 들어 어느새 도착한 백석 고등학교 건물을 바라보았다. 유미: “강당은 저쪽인가 보네.” 유미를 따라 입학식이 열리는 강당으로 향하며, 나는 다시금 방금 보았던 숫자를 곱씹어 보았다. 2019나 2020, 아니, 적어도 2032 정도의 숫자 정도라면 그래도 이해를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몸도 바뀌었는데, 시간여행이라고 못할 건 없지. 암, 그렇고말고. 차라리 3000이나 4000 정도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면 대규모의 몰래카메라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 않았을까. '그래도 이건 정도가 지나친 것 같은데……?' 나는 다시 태블릿을 켜 날짜를 확인해보았다. 2136을 잘못 본 건 분명 아니었다. 태블릿의 날짜 탭에 적혀 있던 숫자란 다름 아닌 136이라는, 세 자리 숫자였다. 나는 장장 2,000년이라는 세월을 거슬러 올라온 걸까? 안 그래도 복잡했던 머릿속이 더 복잡해지는 것 같았다. 입학식이 끝난 뒤, 배정받은 교실에 들어오고 나서도 복잡한 건 여전했다. 내가 배정받은 반은 A반이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교실에 도착하자마자 다른 학생들은 저마다의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울타리 속에 끼어들 겨를 따윈 없었다. 눈에 띄지 않는 구석 자리에 앉은 나는 태블릿을 뒤지며 지금의 상황을 풀어나갈 만한 실마리를 찾아보려는 중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136년이라는 현실감 없는 숫자가 와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원래의 내 몸과 바뀐 몸 사이의 연관성 정도는 찾을 수 있진 않을까. 최대한 상상력을 발휘하려 애를 쓰며, 나는 태블릿에 저장되어 있던 정보들을 뒤졌다. 내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유미: “안녕, 또 만났네?!” 단순한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편의주의적 상황이 아닐까. 나의 곁에 다가온 갈색 머리 여학생은 당연하다는 듯 내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반갑게 손을 흔드는 유미에게, 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유미: “네가 반 배정 잘 되게 해달라고 한 게 효과가 있었나 봐.” 유미는 상냥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띤 채,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 유미: “뭘 그렇게 보고 있는 거야?! 재밌는 거라도 있어?” 나: “아, 그게…… 내가 좀 멀리서 학교를 배정받아서. 근처에 아는 게 없어서 찾아보고 있었던 거야.”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바뀐 몸의 원래 주인은 꽤나 먼 곳에서 이 학교로 배정을 받은 모양이었다. 덕분에 학교에 아는 사람도 없어 보였고, 무엇보다도 부모님과도 떨어져 자취 생활을 하기로 한 듯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 정보를 토대로 그를 흉내 내는 수밖엔 없었다. 유미: “아, 그래서 그렇게 헤매고 있었구나~” 나: “뭐…… 그렇지.” 본의 아니게 나의 행동에 당위성이 부여된다. 유미의 눈동자에서 의심의 눈초리 같은 건 지워진 지 오래였다. 순수한 미소만이 그녀의 눈가에 남아있을 뿐. 유미: “사실 나도 조금 먼 곳에서 학교를 배정받았거든. 그래서 아는 사람도 없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서로 친하게 지내자~” 거부할 수 없을 것만 같은 미소였다. 이미 대답은 정해져 있으니, 넌 그 말만 하면 된다고 이야기하는 듯한 순수한 미소였다. 그 뒤로, 유미는 항상 나와 붙어 다니게 되었다. 학교에서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녀는 나와 함께였다. 처음엔 부담스럽기도 했고, 다시 원래의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유미와 거리를 두려 했지만, 오히려 그럴 때마다 나와 유미 사이의 거리는 점점 좁혀져만 갔다. 새로운 세계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많은 것들이 자취를 감추고, 새로운 것들이 그 자리를 메운 세상. 그 차이는 자릿수가 다른 두 숫자의 간극만큼이나 벌어져 있었으면서도, 단지 숫자일 따름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만큼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여러 가지 것들이 사라졌다는 말밖에는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여파로, 이 세계에서는 자연적인 것들이 모습을 감춘 뒤였다. 농장에서 딴 신선한 과일도, 여름이면 푸른색으로 물들던 관목도, 지겹도록 들려오던 매미들의 울음소리도. 이젠 이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원래의 내 몸으로 돌아갈 방법을 열심히 모색해 보았다. 가끔 잠에서 깨어나면 원래의 나로 돌아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그건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 그렇게 136이라는 숫자가 137로 바뀔 동안에도, 나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유미 덕분에 새로운 세계에서의 생활에 제법 빠르게 적응해가고 있었다. 유미는 모든 것이 서툰 나를 의심조차 하지 않은 채 자기 일처럼 도와줬다. 그렇게 유미와 내가 둘도 없는 사이가 된 건, 두말할 필요도 없는 사실이었다. 원래의 몸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도,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럼에도 내가 여전히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던 건, 무의식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돌아가야 한다는 무언의 아우성 때문이었다. 정체 모를 무의식의 아우성. 나는 그 무의식의 외침을 연어의 회귀 본능 같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나: “이제와서 묻는 건데 말이야.” 유미: “응? 갑자기 뭔데?” 유미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여태껏 궁금했지만 실례가 될 것 같아 미처 하지 못한 질문이었는데. 왠지 지금이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넌 왜 그렇게 나한테 신경 써 줬던 거야?” 유미: “왜? 혹시 싫었어?” 유미는 발걸음 속도를 늦추고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유미: “하긴, 이런 미소녀 여학생이 챙겨 주는데 싫을 리가 있겠어~” 나: “아…… 네.” 유미: “뭐야? 그 반응은?!” 내 미적지근한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유미는 삐진 척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잠시뿐이었다. 유미는 이내 고개를 치켜들더니 인공 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나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유미: “…… 그냥, 그러고 싶었어.” 나: “별다른 이유도 없이?” 유미: “그럼, 다른 이유가 필요해?” 와닿지는 않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도, 유미도, 각자 다른 이유로 잠시 생각에 빠진다. 먼저 입을 연 건 유미 쪽이었다. 유미: “원래 가슴이 시키는 일에는 이유가 없는 법이라구.” 이번에도 와닿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유미다운 이야기였다. 분명 얼마 걷지도 않은 것 같은데, 어느샌가 사거리 앞에 도착해 있었다. 유미: “그럼 내일 봐~ 조심해서 들어가고!” 사거리 앞에 선 유미는 손을 흔들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평소와 같은 인사말 뒤에는 조심하라는 말이 덧붙여졌다. 분명 아까 횡단보도에서 있었던 일 때문이겠지. 나: “알겠어. 내일 봐.” 반대편으로 향하는 유미를 바라보며, 나도 인사를 건넸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휴대용 태블릿을 꺼내 현재 시각을 확인해보았다. 오후 네 시 반. 아직 해가 지기엔 한참이나 먼 시각이었다. 메신저함에는 이메일이 한 통 와 있었다. 30분 전, 학교가 마쳤을 때쯤 도착한 이메일이었다. 현지: 선배! (๑⁺д⁺๑) 이 사이트 좀 확인해 주세요! 발신인을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어렵지 않게 누가 이 이메일을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이런 이모티콘을 써 가며 메일을 보낼 사람이라면 딱 한 명밖에는 없으니까. 사실 메신저 기능을 사용할 일이 극히 제한적이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나: ‘…… 현지네.’ 내게 메일을 보낸 사람은 나와 같이 오컬트부에 속해있는 후배, 현지였다. 아마 지금 동아리에서 조사하고 있는 것 때문에 메일이 온 거겠지. 메일의 본문에는 몇 가지 사이트의 URL이 첨부되어 있었다. 나: 알겠어. 집에 도착하면 확인해 볼게 전송 버튼을 누른지 몇 초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금세 메일이 도착했다는 알림이 나타났다. 현지: (´▽)(´▽) 고마워요 선배! ٩( 'ω' )و 파이팅! …… 빠르다. 난 30분이나 지나서 답장을 보냈는데. 어떻게 저런 이모티콘을 일일이 넣으면서도 저렇게 빨리 답장을 보낼 수 있는 거지. 놀라운 능력이라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태블릿을 도로 주머니 속에 집어넣자, 때맞춰 신호등이 초록불로 바뀌었다. 길을 건너려다 말고, 나는 근처에서 나에게 향하는 듯한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순찰로봇인가? 아니면 환경 미화 로봇?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주변을 둘러보던 나의 시선이 돌연 한 곳에서 멈췄다. 그 순간이었다. 데자 뷰처럼, 시간이 잠시 멈춘 듯한 기분이 또다시 들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나의 시선이 향한 곳. 그곳에는― 소녀: “…….” 나를 바라보는 한 소녀가 있었다. 분명, 방금 횡단보도에서 마주쳤던 그 소녀가 틀림없었다. 소녀: “……!” 반대편 길목에서 나와 눈이 마주친 소녀는 곧장 고개를 돌리더니 좁은 골목길로 사라졌다. 이번에도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 소녀가 사라진 골목길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유는 나도 알 수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이름조차 모를 그 소녀의 눈빛이 마음에 걸려서였을까. 물론 그게 명확한 이유가 되지 못하리라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었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나는 어느새 생면부지의 소녀를 뒤쫓고 있었다. 나: “흐음…….” 일단 무턱대고 골목길로 들어서긴 했는데. 나: ‘어디로 사라진 거야…….’ 그 소녀는 이미 모습을 감춘 뒤였다. 역시 괜한 짓이려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골목길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참 동안이나 더 골목길을 살펴보았지만, 사라져 버린 소녀를 찾기는 역시나 어려운 일이었다. 아스팔트와 건물로부터 반사된 폐열만이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가지 못한 채 내 주변을 맴돌고 있을 뿐, 소녀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목덜미에서는 땀줄기가 주루룩 흘러내렸다.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골목길을 돌아다니느라 그런지, 호흡도 제법 가빠져 있었다. 나: “후우…….” 소녀를 찾는 것을 멈추고는 잠시 숨을 돌렸다. 역시나 괜한 짓이었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었다. 하지만……. 소녀: “………….” 횡단보도에서 처음 그 소녀와 마주쳤을 때, 나를 바라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또렷이 기억났다. 내게 마치 무언가를 말하고 싶다는 듯 흔들리고 있던 소녀의 눈동자. 내가 너무 과한 상상을 하는 건지는 모르겠어도,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어쨌거나, 결정을 내릴 시간이다. 나: ‘…… 돌아가 봐야겠다.’ 집에 가서 현지가 부탁한 것도 찾아봐야 하고. 주머니에서 태블릿을 꺼내어 시각을 확인했다. 오후 다섯 시 십 분. 장장 40분 동안이나 이 좁고 더운 골목길을 헤맸다고 하니, 나도 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드는 찰나였다. 나: ‘…… 신경 쓰이는데.’ 역시 이대로 집에 돌아가기엔 신경 쓰이는 구석이 너무 많아서였을까. 주머니에서 태블릿을 꺼내 시각을 확인한 나는 다시금 주변을 빙글 돌아보았다. 나: “……?” 시선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 주변을 둘러보자, 여지껏 느껴지지 않던 인기척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사람이다.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나: “거기 누구 있어요?” 내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골목길 벽에 부딪혔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메아리가 멎고, 좁은 골목길에는 잠시 침묵이 감돈다. 누구지? 내가 찾던 그 소녀인가? 반대편에서 들려온 덜커덩하는 소리에 급히 고개를 돌렸다. 방금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면, 조금 불친절한 대답임이 틀림없었다. 침묵에 잠긴 골목길에서는 분명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묘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정말 내가 찾던 그 소녀인 걸까.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는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조심조심 발을 내디뎠다. 유미: “우와아아앗!” 어딘가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유미: “까, 깜짝이야…….” 나: “뭐야. 유미 네가 왜 여기에…….” 유미: “그, 그러는 너는? 집에 들어가는 거 아니었어?” 나: “음…… 그러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유미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서로 한바탕 큰 소리를 내고 났더니, 여태껏 맛보지 못한 어색함이 둘 사이를 맴돌고 있었다. 나: “…… 혹시 내 뒤를 밟고 있었던 거야?” 유미: “아, 아니거든? 그냥 우연히 마주친 거거든?!” 국어책을 읽는 듯한 연기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뭐든 잘하는 유미였지만 연기만큼은 영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황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유미의 이마에도 땀이 가득 맺혀있었다. 보아하니, 내가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부터 내 뒤를 밟았던 거구만. …… 물론 나도 누군지 모를 사람을 찾고 있긴 했지만. 나: “…… 어디 가고 있었는데?” 유미: “어, 그, 그게…….” 챙겨주는 건 고맙지만 이렇게 미행까지 할 정도의 집착은 아무래도 좀……. 이거, 얀데레인가 뭔가 하는 거 초기 증상 아닌가? 유미: “…… 헤헤, 길을 잘못 들었나 봐!” 나: “아, 네…….” 전혀 믿음직스럽지 못한 대답에, 나도 전혀 믿음직스럽지 못한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유미는 버럭 목소리를 높이며 내게 말했다. 유미: “그, 그러는 너는?! 집에 간대놓고 어디로 가고 있었던 거야?” 나: “…….” 아까 횡단보도에서 봤던 그 소녀를 뒤쫓고 있었다고 이야기한다면, 유미는 어떻게 반응할까? …… 이것도 비밀로 하는 게 좋겠다. 유미에게는 비밀로 해야 할 게 한 가지 더 늘어났다. 나: “늦었는데, 빨리 돌아가자.” 유미: “…… 정말.”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어째 우리가 처음 만났던 날보다 더 서먹서먹한 분위기였다. 사거리에 도착했을 땐, 해가 곧 지려는 듯 하늘은 발그스레한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나: “그럼 진짜 내일 봐.” 작별인사치고는 특이한 미사여구가 붙은 말을 유미에게 건네고선, 나는 횡단보도를 건너 집으로 향했다. 아직 해가 다 지지도 않았는데, 며칠 치의 특이한 일들을 오늘 하루에 다 겪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피곤함이 몰려왔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며칠 동안 해야 할 운동을 오늘 하루에 다 하기도 했으니까. 집에 도착하자, 태양의 끝자락만이 하늘에 남아 오늘이 다 끝나감을 알려주고 있었다. 다음 날, 교실에 도착했을 땐 유미는 교실 뒤편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리로 향하려는데, 옆에서 유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미: “안녕, 좋은 아침~” 어제 일은 벌써 새까맣게 잊었는지, 유미는 오늘도 하이 텐션을 유지하고 있었다. 현지: “아, 선배. 오랜만이에요.” 그러자 유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현지도 나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나: “어라, 현지 너도 있었네. 여긴 웬일이야?” 현지: “유미 언니가 이야기할 게 있다고 해서요.” 아침부터 이렇게 불러서까지 이야기할 정도라면, 제법 중요한 이야기인가? 현지: “그럼 전 선배도 봤으니까, 이만 가 볼게요~” 나: “벌써? 이야기할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 현지: “이야기는 이미 다 했어요. 다음 동아리 시간에 봐요, 선배~” …… 무슨 일이지? 현지는 내게 인사를 건네고선 금세 교실 밖으로 걸어 나갔다. 나는 자리로 돌아오는 유미에게 방금 전 일의 설명을 요구했다. 나: “무슨 이야기 한 거야?” 유미: “그건 여자들만의 비밀~” 나: “…… 뭐야, 그게.” 뭐, 나중에 현지한테 커피라도 한 잔 사주면서 물어보면 말해주지 않을까. 기말고사가 끝나고, 여름 방학을 앞둔 교실의 시간은 말 그대로 어영부영 흘러간다. 물론 그러는 중에도 생산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유미같은 학생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나는 평균과 조금 더 가까운 쪽이란 말이지. 어쩌다 보니 학교에서의 일과가 끝나고, 벌써 하교할 시간이 되어 있었다. 나는 수업용 태블릿을 캐비닛 속에 넣어두고는 유미를 살펴보았다. 유미는 아직 정리할 게 남았는지 태블릿을 만지작대고 있었다. 유미: “아, 오늘은 학생회 회의가 있어서.” 나의 시선을 눈치챈 유미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유미: “먼저 가. 많이 늦을 것 같아.” 나: “으응, 알겠어. 그럼 수고해.” 유미: “내일 봐~” 교실 밖으로 걸어 나온 나는, 곧장 집으로 향하는 대신 1학년 C반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현지가 교실에 남아있다면 아침에 있었던 일도 물어볼 겸, 같이 하교할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현지는 이미 먼저 집으로 향한 건지, 교실에는 보이지 않았다. 나: ‘…… 어쩔 수 없지.’ 왠지 오늘 하굣길은 평소보다 시간이 더디게 흐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머리 위에서는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고, 발밑에서는 후텁지근한 열기가 올라온다.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으니, 여름의 무더위 속을 걷는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고는 빨리 집에 들어가고 싶다는 것뿐이었다. 여름 방학때 무엇을 해야 할지, 앞으로의 진로 계획이라든지, 오컬트부에서의 일이라든지. 생각해야 할 것들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지만, 무더위에 잠식된 인간은 정상적인 사고와는 거리가 멀어지는 법이다. 집으로 돌아가 에어컨 바람을 쐰다면 정신이 좀 들지 않을까. 교복 셔츠를 펄럭이며 횡단보도의 신호를 기다리던 나는 문득 근처에서 느껴지는 소란스러운 낌새에 그쪽을 바라보았다. 나: ‘무슨 일이지?’ 건너편 길목에서 들려오는 소리인 것 같았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에는 서너 명 정도의 사람이 몰려 있었다. 그리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무더위 속에 잠들어 있던 나의 호기심을 깨우기엔 충분한 수였다. 횡단보도를 건너려다 말고, 나는 사람들이 몰려 있는 곳으로 슬그머니 걸어가 보았다. 일렬로 모여 있는 사람들 틈에는 평소에 길거리에서 흔히 보이던 로봇들이 있었다.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무더기로 모여 있는 로봇들이 방향감각을 상실하고 이리저리 비틀대고 있었다는 것 정도.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가끔씩 안내로봇이 고장나는 경우는 있다 하더라도, 이렇게 단체로 맛이 간 경우는 처음 본 것 같은데.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었다. 소란의 규모도 점점 더 커져가고 있었다. 중앙 관제 센터에 연락을 취하는 사람 한 명을 제외하면, 다른 사람들은 모두 제각각 비정상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로봇들을 빤히 바라보며 한 마디씩을 내뱉을 뿐이었다. 익명: “혹시 중앙 관제 센터가 해킹이라도 된 거 아냐?” 익명: “글쎄~ 누가 장난이라도 치는 건가?” 익명: “킥, 로봇도 더위 먹어서 맛 간 건 아닐까?” 그러고 보니, 1년 전 이맘때쯤에도 이런 일이 있지 않았던가? 그때는 이런 일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기에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던 기억이 났다. 정말 로봇이 더위라도 먹는 걸까. 여하튼, 이런 무더위 속에서 사람들의 신경을 끈 것 치고는 별일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집으로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소란의 틈에서 고개를 푹 숙인 채 길을 걷고 있던 한 여학생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나: ‘어제 그 여자애……?’ 나는 발걸음을 옮기려다 말고 그 자리에 박힌 듯 멈춰 섰다. 바닥을 바라보며 길을 걷는 소녀의 주변에서는 여름답지 않은 서늘함이 느껴졌다. 소녀의 시선은 아래쪽으로 늘어진 짧은 단발 머리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어제의 그 시선이 또렷이 떠올랐다. 나를 지켜보던, 날카로운 시선……. 당연하겠지만, 그 소란의 현장 속에서 그녀를 신경 쓰는 사람은 오직 나뿐인 듯했다. 나는 멍하니 소녀가 반대편 길목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때였다. 익명: “어, 이거 봐. 이제 다시 제대로 움직이는 거 같은데?” 익명: “그러게, 잠시 관제센터에 문제가 있었나 봐. 소녀가 반대편 길목으로 사라지자, 제 기능을 되찾은 로봇들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시적인 소요가 끝나자, 모여 있던 사람들도 하나둘 흩어져 갔다. 뭐지? 단순히 타이밍상의 문제이며, 우연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기엔 어제의 일도 그렇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머릿속을 맴도는 의문점이 나를 움직였다. 나는 소녀가 걸어간 길목을 따라 그녀를 뒤쫓았다. 이번에도 어제와 같은 좁은 골목길이었다. 골목길 한 쪽에서 소녀의 뒷모습을 잠깐 발견하고는 속도를 내어 보았지만, 소녀는 자신의 뒤를 뒤쫓는 나를 수상쩍게 여기기라도 한 건지 내가 뭐라 말을 건넬 틈도 없이 자신도 속도를 올렸다. 왠지 이번이 아니면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열심히 소녀의 뒤를 따라갔다. 물어보는 것이다. 왜 나를 처음 보고선 그렇게 놀란 것이며, 나를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그리고 방금 있었던 일은 무엇인지. 무더위에 잠식되어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던 나의 뇌는 어느덧 원래의 상태를 되찾은 모양이었다. 소녀가 지나간 골목길의 모퉁이를 돌려는 순간. 나: “우와앗……!” 무언가가 다리에 걸리는 느낌과 함께, 내 몸이 균형을 잃는다. 무게중심 바깥으로 쏠려버린 내 몸은 곧장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곧이어 팔과 딱딱한 아스팔트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오고, 팔꿈치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올라왔다. 나: “아야야야야…….” 땅바닥에 떨어지면서 받은 충격을 고스란히 받아낸 오른쪽 팔을 부여잡았다. 다행히 큰 상처는 아니고, 가벼운 타박상 정도인 것 같았다. 몸을 털고 일어나려는데, 나의 앞에 누군가가 스윽 모습을 드러냈다. 익명: “제가 보이나요?” 소녀였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소녀. 하지만 소녀가 건넨 뜻밖의 물음에, 나는 그만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익명: “역시, 당신은 제가 보였던 거군요.”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눈치챈 건지, 소녀는 그렇게 단정지었다. 내가 몸을 일으키자, 소녀는 이야기를 이어갔다. 소녀: “왜 계속 저를 쫓아왔던 거죠?” 나: “그거야…… 너도 어제는 나를 계속 지켜보고 있었잖아?” 소녀: “…… 그것도 그렇네요.” 납득했다는 듯,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불필요한 오해가 생기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었다. 소녀: “그나저나, 당신은 정체가 뭐죠?” 나: “응? 정체가 뭐냐니?” 소녀: “어째서 당신은 저를 볼 수 있는 거고…….” 소녀는 잠시 머뭇대더니, 자신도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녀: “왜 당신의 눈에서는 '죽음'이 보이지 않는 거죠?” 죽음? 보인다? 아무리 이런 쪽으로 이해심이 넓은 나였지만, 소녀의 말을 곧장 이해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나의 의아한 반응을 본 소녀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소녀: “혹시 당신도, 저와 같은 유령인가요?” 나: “아, 아니. 난 그냥 학생인데? 그리고…… 멀쩡히 살아있기도 하고.” 소녀: “하긴, 그렇겠죠.” 역시나, 라고 말하는 듯한 소녀의 표정에는 티 나지는 않지만 허둥지둥하는 기색이 잔뜩 묻어 있었다. 대뜸 내게서 죽음이 보이지 않는다느니, 내가 자신과 같은 유령이 아니냐느니 하는 말을 일말의 설명조차 없이 꺼내다니. 어지간히도 말주변 없는 유령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내가 대신 묻는 수밖엔. 나: “그런데 갑자기 유령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소녀에게 건넨 첫 번째 질문이었다. 소녀는 질문을 받는 것도 익숙지 않았는지, 잔뜩 당혹스러운 기색을 내비치며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나: “다짜고짜 유령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이해하기 힘들잖아.” 소녀: “그러니까…… 믿기 힘들겠지만, 지금 당신 눈앞에 보이는 저는, 유령이니까요. 다른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유령 말이에요.” 소녀는 자신의 차분한 목소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더듬거리는 투로 자신이 유령임을 설명했다. 나: “음…… 그렇구나.” 소녀: “뭔가요, 그 반응은. 어째서 의심하지 않는 거죠? 자기 앞에 나타나 다리를 건 사람이 대뜸 자신을 유령이라고 소개하는데.” 나: “아, 그게…… 평소에도 그런 거에 관심이 많아서. 유령이 꼭 있을 거라 생각했어.” 믿기지 않는다는 반응을 보인 건, 도리어 내가 아닌 소녀 쪽이었다. 유체이탈도 있고, 시간여행도 있는데 유령이라고 없겠는가. 유령과 마주했다고 해서,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소녀는 내 무덤덤한 반응이 아무래도 믿기지 않은 듯했다. 소녀: “…… 그런가요. 한 번 정도 사람 앞에 설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왠지 소녀는 의심해주기를 바랐다는 듯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나는 두 번째 질문을 건넸다. 나: “네가 유령이라는 건 알겠어. 그런데, 죽음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무슨 뜻이야?” 소녀: “말 그대로예요. 유령의 능력인지, 동질감을 갈구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소녀: “전 다른 사람의 죽음이 보여요.” 나: “잘 상상이 안 가는데…… 죽음이라…….” 죽음을 본다. 나는 내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 소녀의 말을 그려보려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나: “수명이 얼마나 남았는지, 그런 걸 말하는 건가?” 소녀: “아뇨. 사람의 눈을 보면, 그 사람이 죽는 장면이 보여요.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서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고스란히 색으로 나타나 제게 보이죠.” 나: “으음……. 무서운 능력이네.” 잠깐 침묵이 찾아오려는데, 소녀는 갑자기 내 손목을 붙잡고는 나를 골목길 밖으로 이끌었다. 나의 손목을 붙잡은 소녀의 손은 유령이라는 말에 걸맞게 싸늘함이 느껴졌다. 소녀: “자, 봐요.” 소녀는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던 한 중년 남자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 남자는 아무런 반응도 없이, 그저 신호가 바뀌기만을 계속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소녀는 자신이 유령임을 증명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었다. 신호가 바뀌고, 그는 반대편으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걸어갔다. 옆에서 사람이 다가오자, 소녀는 다시 나의 손목을 붙잡고는 인적 드문 골목길 속으로 숨어들었다. 골목길로 숨어든 소녀는 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소녀: “저 사람은 병으로 죽나 봐요. 다행히 평범한 장면이네요. 허무하리만치 새하얀 색이에요.” 나: “아, 으응.” 소녀는 자신이 본 죽음의 감상을 감정 없이 읊조렸다. 그녀의 곁을 맴돌던 음울함이 한층 더 짙음을 더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위화감이 드는 음울함이다. 소녀: “자, 이제 확실해졌죠? 제가 유령이라는 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잠시, 생각에 빠진다. 방금 전 소녀의 말에 섞여있던, ‘다행히’라는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나: “…… 그런데 말이야. 괜찮아?” 소녀: “…… 뭐가요?” 나: “아무리 유령이라 해도, 사람이 죽는 장면만 계속 보다 보면…….” 소녀: “맞아요. 방금 그 사람처럼 평범하게 죽는 사람도 있다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까요.” 애초에 반박할 생각은 없었던 것처럼, 소녀는 내가 말을 꺼내자마자 나의 이야기에 수긍했다. 소녀는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소녀: “무서워요. 더 이상 사람이 죽는 장면도 보고 싶지 않고, 영혼처럼 이곳을 떠돌아다니고 싶지도 않은데…….” 나: “…….” 소녀가 울먹였다. 힘겹게 목소리를 쥐어 짜내는 소녀를 바라보며, 그제야 음울함 아래에 가려져 있던 그녀의 앳되어 보이는 외모가 눈에 들어왔다. 많아봤자 중학생 정도로 되어 보이는 소녀의 얼굴엔 나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무거운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소녀가 겪었던 감정을, 나는 아무래도 가늠할 수 없겠지. 소녀: “당신의 눈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어요.” 소녀: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처음이에요. 이렇게 누군가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 있었던 건.” 소녀: “처음 봤을 땐, 당신도 저처럼 유령인 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나: “옆에 있던 그 여자애를 봤겠네.” 소녀: “네. 그 사람의 눈에선 죽음이 보였어요. 그때 당신도 사람인 걸 알았죠.” 유미가 죽는다……. 글쎄, 지금으로선 전혀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나: “그래서 도망갔던 거야?” 소녀: “맞아요.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나: “그래서 나를 계속 지켜봤던 거고?” 소녀: “…… 네.” 소녀의 그늘진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자신을 도와달라는 듯한 무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분명 소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내게 무언의 요청을 하고 있는 것이리라. 하지만, 내가 마땅히 할 수 있는 건……. 나: “아, 그런데 지낼 곳은 있어?” 소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녀: “유령인걸요.” 짧지만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을 정도의 대답이었다. 나: “그럼, 당분간은 내 집에서 지낼래? 집에 다른 사람도 없고, 이렇게 떠돌아다니는 것보다는 나을 테니까.” 물론 당분간이 어느 정도가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소녀: “…… 그래도 돼요?” 몸을 일으키며, 소녀는 다시 한번 내 말을 확인하듯 물었다. 나: “으응, 너만 괜찮다면야.” 나의 대답을 들은 소녀는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내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겠지. 나: “아, 잠깐 학교에 들렀다 가자. 챙겨와야 할 게 있어.” 소녀: “…… 알겠어요. 먼저 앞장서주세요. 따라갈 테니까요.” 소녀는 나의 뒤를 따라왔다.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게, 마치 그림자가 내 뒤를 따라오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나: “아, 그런데 유령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을 건드릴 수는 있는 모양이네.” 길을 걷던 중, 나는 문득 생각난 게 있다며 나의 뒤를 따라오고 있던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소녀: “네. 눈에 안 보이기만 하고, 다른 건 살아있을 때랑 똑같은 거 같아요. 배도 고프고, 덥기도 하고, 졸리기도 하고…… 아, 다른 사람을 보면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도 빼고요.” 나: “그리고 온기도, 인기척도 안 느껴졌어.” 소녀: “온기…… 라고요?” 나: “아까 네가 내 손목을 잡았을 때, 되게 차가웠거든.” 소녀: “그런가요. 그건 처음 알았네요. 아, 기분 나빴다면 사과할게요.” 나: “응? 아, 아냐. 전혀 기분 나쁘지 않았으니까.” 뒤를 돌아보았지만, 소녀는 여전히 고개를 땅에 파묻은 것처럼 푹 숙인 채 길을 걷고 있었다. 잠깐 봤을 땐 몰랐지만, 이렇게 보니 무척이나 안쓰러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 “그렇게 걷다 사고 나겠어.” 나는 소녀의 손을 잡았다. 소녀: “뭐, 뭔가요? 갑자기……?!” 나: “그렇게 아래만 보고 걸으면 위험하잖아.” 소녀: “그, 그렇지만…….” 나를 빤히 바라보는 소녀. 소녀의 눈동자가 나를 처음 바라봤을 때처럼 흔들렸다. 나: “어, 으음…… 기분 나쁘면 놓아도 돼.” 소녀: “…… 짓궂네요.” 그러고는, 소녀는 내 손을 조금 더 세게 잡았다. 소녀: “따뜻해요.”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 소녀는 나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소녀: “여기는 뭐 하는 곳인가요?” 내가 소녀와 함께 도착한 곳은 오컬트부실이었다. 여태껏 바닥을 향해 얼굴을 파묻고 있던 소녀는 드디어 고개를 들고선 오컬트부실이 신기한 듯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내 멋대로 꾸민 오컬트부실은 다른 교실과는 달리 제법 아날로그틱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소녀: “여기 있는 이 인형들은 뭔가요?” 나: “아, 학예제때 쓰려고 모아둔 거야.” 소녀가 가리킨 것은 나와 현지가 만들어 뒀던 인형들이었다. 물론 평범한 인형은 아니고, 부두인형과 테루테루인형이랍시고 만들어 둔 것들이었는데. 소녀는 그 인형들을 제법 유심히 바라보는 중이었다. 소녀: “학예제요?” 나: “응. 여름 방학 끝나고 학교에서 열릴 축제인데, 꽤나 규모가 큰 행사라 이것저것 많이 하거든. 올해는 불꽃놀이도 한다더라고.” 소녀: “재밌겠네요.”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인 소녀는 이내 선반의 인형들에게 관심을 도로 옮겼다. 소녀: “혹시 하나 가져도 될까요?” 나: “인형 말이야? 그건 괜찮지만, 갑자기 왜?” 소녀: “…… 마음에 들어서요.” 무덤덤하게 들린 이야기였지만, 분명 소녀의 목소리에는 어린애같은 면모가 묻어있었다. 어울린다고 해야 할지, 안 어울린다고 해야 할지. 나: “마음대로 해.” 진열장에 놓여있던 인형을 빤히 살펴보던 소녀는 테루테루인형 하나를 품에 안았다. 인형을 껴안고 있는 소녀를 묘한 눈치로 보고 있던 나는, 소녀에게 문득 떠오른 궁금증 하나를 물어보았다. 나: “그런데 말이야, 네가 인형을 들고 있으면 나한테는 그대로 보인다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어떻게 보이는 거야?” 인형이 공중에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인다면 분명 이상할 텐데. 소녀는 자신이 고른 테루테루인형이 마음에 드는지 인형과 눈높이를 맞추어 보더니, 이내 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말해주었다. 소녀: “제 손에 닿는 물건들은 다른 사람들에겐 안 보이는 것 같더라고요.” 나: “아, 그런 현상 들어본 것 같아. 영체화라고 하던가.” 유령과 맞닿은 물건이 보이지 않게 되는 현상. 1학년 때 조사해 본 적 있는 거라며, 나는 소녀의 말에 반응을 보였다. 소녀는 그런 현상이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적당한 크기의 생명체가 아닌 물건에만 일어난다고 덧붙였다. 그러고는 지금의 상황이 어딘가 우스운지, 소녀는 슬며시 실소에 가까운 헛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소녀: “저는 살아있었을 때, 오컬트 같은 건 전혀 안 믿었겠죠?” 소녀는 품에 안은 테루테루인형을 만지작대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나: “그랬을 것 같아 보이긴 해.” 부정하지는 않았다. 소녀: “그쪽은 어쩌다 오컬트에 관심을 갖게 된 건가요?” 나: “뭐…… 어쩌다 보니.” 이야기하자면 너무 길어질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대충 얼버무려 대답을 해버렸다. 소녀: “…… 그렇군요.” 소녀는 시선을 돌려 오컬트부실의 반대편을 둘러보았다. 소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파일로 묶어 정리해둔 자료들이 놓여있는 책장이 있었다. 소녀: “다른 곳에선 보기 힘든 것들이네요.” 나: “그렇지. 요즘 종이가 사용되는 곳은 잘 없으니까.” 나 자신이 구세대의 망령이라는 것을 티라도 내고 싶은 듯한 발언이었지만, 소녀는 이를 눈치채지는 못한 것 같았다. 아무래도 오컬트부실 특유의 아날로그틱한 분위기가 그녀의 마음에 들었는지, 소녀는 그 뒤로도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소녀가 그러는 동안, 나는 유령이나 귀신과 관련해 정리해둔 자료들을 챙겼다. 도시 괴담이나, 구전 설화 같은, 귀신과 관련된 자료들이었다. 나: ‘대충 이 정도려나.’ 책장에 정리해두었던 자료들을 챙겨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컴퓨터에 내 휴대용 태블릿을 연결하려는데,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 “여기 이건 뭔가요?” 나: “아아, 그거?” 소녀는 부실 구석에 놓여있던 전자레인지 정도 크기의 물체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 “텔레이도스코프라고, 동아리에서 만들고 있는 거야. 신경 안 써도 돼.” 실은, 나도 그게 뭔지 잘 몰라서 하는 말이지만. 태블릿을 연결한 컴퓨터가 켜지는 동안, 나는 소녀에게 넌지시 질문을 건넸다. 나: “죽음을 볼 수 있다고 했잖아.” 소녀: “네.” 텔레이도스코프에서 여전히 눈을 떼지 않은 채, 소녀는 나의 물음에 대답했다. 나: “그리고 1년 정도 이곳을 떠돌아다녔다고 했고…….” 말을 꺼내려다 말고, 나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걸까? 잠깐의 침묵이 흐른다. 소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더니, 도리어 자신이 먼저 말을 꺼냈다. 소녀: “저를 없애주세요.” 나: “…….” 내가 말을 미처 꺼낼 새도 없이, 소녀는 또박또박 자신의 요구사항을 말했다. 소녀: “알아요. 꺼림칙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거.” 나: “으, 으응…….” 소녀: “그래도, 부탁해요.” 천천히 나를 향해 다가오는 소녀. 소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당신밖에 없는걸요.” 나: “…… 알겠어. 네가 원하는 건.” 소녀를 맴돌던 음침한 분위기가 오컬트부실 특유의 분위기와 맞물려 그림자를 이룬다. 침을 꼴깍 삼켰다. 마른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더워서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나: “성불(成佛)인 거지?” 애써 꺼낸 나의 말에, 소녀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선, 나는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정말로 내가 해야 할 일이 소녀를 성불시키는 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지만, 일단은 최소한의 정보나 자료가 필요한 건 분명했다. 유령이 이승을 떠도는 이유가 구전 설화나 도시 괴담에서 알려진 것과 같이 삶에 미련이 남아서 그런 것이라면, 소녀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다. 물론 저렇게 어린 나이에 죽어버렸다면 나라도 미련이 안 남고는 못 배겼을 거 같기도 하다. 소녀는 무슨 이유로 죽었던 걸까? 생각해 보니 제법 궁금하기도 하다. 나: “이런 질문, 실례라는 건 아는데. 무슨 일로 죽었던 거야?” 소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 직설적으로 물어본 걸까. 나: “아, 미, 미안. 그래도 조사하는 데 필요할 것 같아서…….” 허둥대는 나의 앞에, 자신이 유령임을 인지시키기라도 하려는 듯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소녀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이번이 두 번째였다. 나: “으응……?” 소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고요. 이름이 뭐였는지도, 어떤 학교에 다녔는지도, 가족관계가 어떻게 됐는지도, 친구가 누가 있었는지도…… 심지어 제가 누구였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걸요.” 그런 건가. 안절부절못하는 소녀를 앞에 둔 나는 최대한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려 노력했다. 나: “기억을 모두 잃은 거야? 언제부터?” 소녀: “…… 잘 모르겠어요. 아마 유령이 되고 나서였을 거예요.” 나: “으음…… 그렇구나.” 소녀: “도와 달라는 거…… 너무 무리한 부탁이었겠죠.” 소녀는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말끝을 흐렸다. 나: “아냐. 그래도 명색이 오컬트부 부장인데, 한 번 해봐야지. 1년 정도라고 했지? 네가 이곳을 떠돌게 된 지가.” 소녀가 넌지시 고개를 든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슬며시 내게서 시선을 피하며 대답을 건넸다. 소녀: “네. 이게 두 번째 여름이니까요.” 목 끝까지 ‘나와 비슷하구나’라는 이야기가 올라왔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나는 눈길을 피하고 있던 소녀의 겉모습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대충 중학생 같아 보이는 외모에, 교복도 분명 중학생의 것으로 보이는 모양새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주변에서 저런 형태의 교복을 본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나: ‘근처 중학교 학생이 아니었던 건가……?’ 교복에는 소녀가 다녔던 중학교를 추측할 수 있을 만한 단서 같은 건 마땅히 보이지 않았다. 이름표도, 학교 이름도, 심지어 학교를 나타내는 앰블럼 같은 것도 소녀의 교복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짙은 녹색 옷깃의 블라우스와 같은 색의 치마……. 어딘가 익숙한 색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곧장 기억해 내기엔 너무나도 흐릿한 기억인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수십 개나 되는 백석시의 중학교를 모두 찾아다닐 수는 없는 법이니까. 소녀가 자신의 나이를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최근 1년간 있었던 여중생 사망 사고를 찾아보면 되겠지. 컴퓨터를 켠 이유는, 현지가 만들어 두었던 데이터베이스를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도시 괴담의 조사를 위해서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자료가 꼭 필요하다며, 근 몇 년간 일어났던 사건 사고들을 모두 정리해놓은 거대한 데이터베이스. 데이터베이스에 최근 1년간 발생한 만 12세에서 15세 사이의 여성 사망자를 검색한 결과, 제법 많은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자살, 교통사고, 화재……. 대부분의 사고는 도시 중심부가 아닌 외곽지역에서 일어난 듯해 보였다. 나는 그중에서도 6월과 8월 사이에 일어났던 자료만을 선택해 휴대용 태블릿에 옮겨 두었다. 소녀: “뭘 찾는 건가요?” 나: “최근 있었던 사망 사고들. 기억이 안 난다고 했으니까, 직접 찾아봐야지.” 이곳의 시간으로 135년의 여름에 있었던 사망 사고나, 혹여나 해서 추가한 실종 사고들이었다. 가지고 있는 정보로 최대한 간추려 보긴 했지만, 그래도 꽤나 많은 양의 자료였다. 태블릿을 컴퓨터에서 연결 해제시키고선, 소녀에게 집으로 가자는 손짓을 전했다. 나: “돌아가자. 자료는 집에서 확인하는 게 좋겠어.” 소녀: “잠깐만요. 거기 오른쪽…….” 나: “오른쪽?” 소녀의 말을 듣고선 오른손을 돌리자, 팔에 검붉은 색의 액체가 눅진하게 묻어있었다. 소녀: “아, 아까 넘어질 때 다친 모양이에요…….” 나: “아아, 이거. 괜찮아.” 나는 소녀에게 이번에도 괜찮다는 이야기만을 건넸다. 나: “그럼 잠시 핏자국 좀 씻고 올게. 잠깐만 기다려.” 얼마나 정신이 없었길래 팔에 피가 묻어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 아까 소녀의 손을 잡은 쪽과 반대쪽이라 눈치채는 것이 늦어진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부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컬트부실 옆 화장실에서 핏자국을 닦아내고 복도를 걸어오던 나는, 부실 앞에서 익숙한 사람 한 명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 “네가 지금 여긴 웬일이야?” 현지: “어라. 거기 있었네요, 선배. 부실 안에 있을 줄 알았는데.” 같이 하교하기 위해 교실에서 찾았을 땐 보이지 않았던 현지가 자신의 휴대용 태블릿을 만지작거리며 오컬트부실 문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나: “아직까지 학교에 남아있었던 거야?” 현지: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현지의 머리카락에 땀방울이 묻어있는 걸로 보아, 현지도 나처럼 어딘가를 돌아다녔던 모양이었다. 현지: “그럼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 “어, 으응. 아, 잠깐, 잠깐만!” 현지: “네에……? 잠깐만이라뇨?” 나의 외침이 무색하게도, 현지는 이미 부실의 문을 연 뒤였다. 급히 현지를 가로막고는 오컬트부실 안을 살폈는데. 나: “……?” 소녀가 보이지 않았다. 나: “혹시 여기 있던 여자애 못 봤어?” 현지: “여자애라뇨?” 현지는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으로 오히려 내게 되물었다. 오컬트부실 안으로 발걸음을 내디뎠지만, 아무런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 그건 소녀가 있어도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으려나…… 나: “…… 아.” 소녀: “…….” 내가 소녀를 발견한 곳은 부실 한편에 놓인 책상 뒤쪽에서였다. 책상 아래에 쪼그린 채, 소녀는 몸을 벌벌 떨고 있었다. 나: “괜찮아?”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급히 소녀의 안부를 물었다. 소녀의 대답 대신, 뒤쪽에서 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지: “선배, 지금 누구랑 이야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소녀가 내 눈에만 보인다는 사실을 깜빡 잊고 있었다. 잠깐 사이에 있었던 일이 너무나도 현실감 있었던 걸까. 나는 그만 소녀가 현지의 눈에는 보이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었다. 현지: “선배?” 현지의 목소리가 가까워지자, 소녀는 허둥지둥하는 기색을 보이며 급히 오컬트부실 맨 구석 모퉁이로 반쯤 기어가듯 향했다. 소녀는 그곳에서 벽과 마주한 채 거친 호흡을 반복했다. 소녀: “…… 저 사람은 누군가요?” 나: “아, 으음…….” 소녀: “………… 제 목소리는 아마 저 사람에겐 들리지 않을 거예요. 아까 길에서도 확인했잖아요?” 확실히 그랬다. 소녀가 내 옆에서 몇 마디 말을 재잘거리기도 했지만, 그 중년 남성은 전혀 그 소리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니까. 나: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자.” 현지: “네? 으음…… 알겠어요.” 현지는 분명 나를 이상하다는 눈치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현지는 이번에도 나를 이해한다는 표정과 함께 부실 밖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 “오컬트 쪽으로 잘 아는 후배거든. 잠시 이야기 좀 해 보고 올게.” 소녀: “…… 알겠어요.” 나는 부실에 홀로 남아있을 소녀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대답을 하고서도, 소녀는 여전히 몸을 떨고 있었다. 나: “이 오컬트부의 나를 제외한 유일한 부원이야. 다른 사람이 찾아올 일은 이제 없을 테니까, 걱정 안 해도 돼.” 소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을 안정시켜야 하는지, 일어날 생각은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일단은 소녀를 뒤로 한 채, 나는 현지를 따라 부실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현지: “무슨 일이에요? 안에 아무도 없는 거 아니었어요?” 복도에서 나를 기다리던 현지는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의아한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나: “으응, 그렇긴 한데…….” 현지: “네에……? 선배, 귀신이라도 들린 거예요?” 분명 형식적인 말이었겠지만, 날카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바로 여자의 감…… 이라기보다는 오컬트 소녀의 직감인 것일까. 나: “그러는 너는, 이 시간에 동아리 부실에는 왜 온 거야?” 현지: “음…… 글쎄요?” 아무래도 내가 먼저 방금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지 않는다면 자신도 이야기할 마음이 없다고 말하는 표정인 듯했다. 어쩌면 내가 먼저 설명을 해준다더라도 이야기할 마음이 없는 걸지도. 나: “커피 한 잔이면 돼?” 현지: “카라멜 마끼아또로요~” 뭐, 어쩔 수 없다. 근처 카페에서 이야기를 이어 나가는 수밖엔. 현지: “헤, 고마워요 선배.” 테이블에는 애초에 이야기했던 카라멜 마끼아또 말고도 쇼트케이크 한 조각이 접시에 담긴 채 놓여 있었다. 현지: “선배는 왜 맨날 아이스 아메리카노예요?” 나: “맛있어서.” 현지: “흐음, 특이한 취향이시네요.” 치킨을 먹을 때 자신은 목이 제일 맛있다며 내게 다리를 건네주던 부모님의 심정이 이런 것이었을까. 우득우득우득우득. 현지가 쇼트 케이크를 한 입 베어 무는 동안, 내 입에선 얼음 씹는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려 퍼졌다. 현지: “그래서, 부실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나: “네가 말한 대로야.” 현지: “네? 제가 뭐라고 했었나요?” 나: “귀신이라도 들렸냐고 했잖아?” 현지: “네에……?” 쇼트케이크를 우물거리던 현지는 평소에는 들을 수 없던 투의 목소리로 당혹스러움을 표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더 빨아들이고선, 나는 현지에게 여태껏 있었던 일을 적당히 설명해주었다. 나의 이야기를 들은 현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날, 내가 현지에게 나의 비밀을 털어놓았을 때처럼 말이다. 현지: “그래서, 선배의 눈에만 보이는 유령이 있다는 거죠?” 나: “으응, 그렇지.” 현지: “유령이라…….” 남아있던 쇼트 케이크를 마저 입에 털어넣고선, 현지는 깊은 생각에 빠졌다. 잠깐 동안 나와 현지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나 역시 남아있던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마지막 모금을 빨아들인다. 빨대에 공기방울이 통과하는 소리가 은근히 요란한 소리로 침묵을 깬다. 나: “아, 그래서 말인데. 오컬트부실엔 웬일이었어?” 현지: “그거요?” 나: “으응, 보통은 집으로 곧장 돌아가는 편이잖아?” 현지: “아침에 유미 언니가 부탁을 하더라고요. 방과 후에 혹시 선배가 이상한 곳으로 가면 뒤를 밟아달라고요.” 나: “으음, 그런 거였구나……” 나: “가 아니라. 갑자기 그런 부탁을 했다고?”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은 반응을 보인 현지 때문에 하마터면 그대로 넘어갈 뻔했다. 미행도 모자라서 미행교사라니. 아니, 애초에 얘는 왜 그런 부탁을 덥석 받아들인 거지. 아까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땀방울이 맺혀있던 것도 다 그런 이유에서였나 보다. 현지: “네. 아마 유미 언니는 선배가 오래된 여자 친구라도 숨기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 같던데요?” 나: “뭐야, 왜 그런 추측이 나온 건데.” 현지: “선배는 유미 언니한테 고등학교 입학 전에 있었던 이야기를 한 적이 없잖아요. 아마 그래서 그런 게 아닐까요?” 나: “그럴 수도 있겠네…… 라고 하면 안 되는 거잖아. 그렇다고 다른 사람한테 미행을 시키다니……. 그리고 그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이상하다고.” 현지: “헤헤, 그러면 나중에 밥 사준다고 하길래 그만…… 게다가 선배, 저한테도 과거 이야기는 잘 안 해주시잖아요. 저도 궁금했다고요.” 나: “말했잖아. 나도 잘 기억이 안 난다고. 어렴풋이 나는 것뿐이라, 이야기하긴 좀 그래.”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인 나는 얼음 하나를 더 우작거렸다. 미적지근한 내 반응과는 달리 입안에서 잘게 부서지는 얼음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현지: “어쨌거나, 선배가 바라는 건 제가 선배를 도와 그 유령을 성불시켜주는 거죠?” 나: “으응, 맞아. 물론 성불을 시켜줘야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그 유령을 사라지게 해줘야 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현지: “그나저나 신기하네요. 살아있었을 때의 기억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니.” 나: “그러게. 나도 처음 듣고선 조금 놀랐어. 도시 괴담을 봐도 이승을 떠도는 유령이 살아 생전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았다는 일은 별로 없었으니까.” 현지: “왜요, 여기 있잖아요.” 현지의 검지가 나를 향한다. 표정 변화가 없어 농담인지 진담인지는 구별하기 힘들었지만, 나는 이번에도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나: “난 귀신은 아니잖아. 그리고 기억은…… 그 유령 여자애처럼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것도 아니고. 일부만 안 날 뿐이라고. 일부만.” 물론 제일 중요한 걸 기억하지 못하고 있긴 하지만.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 않는 그 순간의 기억. 어쩌면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순간과 그 장면이 내가 이곳에 오게 된 이유를 밝혀줄 마지막 열쇠는 아닐까 생각했다. 현지: “혹시 연관이 있을까요?” 나: “으음…… 연관? 어느 부분에서?” 현지: “유체 이탈도 영적인 것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잖아요. 자세히는 잘 모르겠지만요.” 나: “글쎄…….” 어려운 이야기다. 애초에 오컬트란, 이런 거니까. 현지: “이론적인 무언가로 설명하기는 어려울지도 몰라요. 단순히 어떤 현상이라고만 생각하는 게 오히려 지금으로선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거고요.” 나: “그렇겠지.” 현지: “그러니까…… 해답을 찾는 건 어쩌면 일종의 퍼즐 맞추기같은 거겠네요.” 나: “퍼즐 맞추기라…… 그렇다고 하기엔 아직 퍼즐 조각을 찾지도 못하고, 퍼즐 판만 있는 셈이잖아?” 현지: “헤, 그렇기도 하네요. 그래도 재밌을 거 같아요. 그럼 유령 성불 프로젝트는 지금 당장 시작하는 건가요? 선배의 유체이탈 건은요?” 나: “급한 건 내 쪽보다는 그 유령 여자애 쪽일 테니까. 우선 그 유령 성불 프로젝트부터 먼저 해결하는 걸로 하자.” 현지: “알겠어요. 아, 그래도 조사하다 보면 뭔가 연관이 있는 게 생길지도 모르는 거니까요.” 연관성이라……. 나는 여전히 긴가민가하는 반응을 보였다. 나: “그럴 수도 있으려나…….” 현지: “아무래도 그 유령이 선배 눈에만 보인다는 게 마음에 걸리잖아요. 다른 사람도 아닌 하필 오컬트 현상 그 자체인 선배한테만요.” 단순히 우연이라고 한다면 우연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우연과 필연, 둘 중 하나겠지만 둘 다 어색한 설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의 뉴런들이 복잡하게 엉켜갔다. 나는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현지에게 말을 건넸다. 나: “먼저 들어가. 난 부실에 들렀다가 그 유령 여자애랑 같이 갈 테니까.” 현지: “네, 내일 봐요 선배~”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현지가 문득 나를 바라보았다. 막 양자택일의 고민에서 빠져나오려던 나는 그대로 현지의 눈동자와 마주한다. 현지: “아, 맞다. 그런데 그 유령이 저희 또래 나이 정도의 여학생이라고 했죠?” 나: “응. 중학생 정도로 보였어.” 현지: “흐으으으음…….” 나를 바라보고 있던 현지의 동그란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변한다. 뭘까, 이 반응은. 나: “야, 그 눈빛은 뭐야.” 현지: “네? 아무것도 아녜요. 역시 오컬트랑 로맨스는 잘 안 어울리겠죠?” 나: “유령이랑 로맨스라니, 으시시하잖아.” 현지: “왜요? 괜찮은데.” 나: “평소에 그런 류의 소설 읽는 거야?” 현지: “어라, 어떻게 아셨어요? 선배 독심술도 쓸 줄 아는 거였어요?” 나: “아니거든. 게다가 우리가 해줘야 할 일은 그 애를 무사히 사라지게 하는 건데, 너무 친해지기도 좀 그렇고…….” 말을 하다 말고,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끝을 흐렸다. 현지: “흐음, 냉정하시네요.” 곧장 내 발언에 대한 현지의 평가가 이루어진다. 현지: “하긴, 선배가 다른 친구가 없는 이유도 그런 거겠죠. 유미 언니만 빼면요.” 나: “뭐, 그렇기도 한데…….” 현지: “냉정한 게 아니라, 친절한 거라고 해야 할까요?” 나: “글쎄, 그건 아닌 것 같아.” 현지: “…… 그런가요.” 희미한 미소가 현지의 입가를 맴돈다. 웃음의 의미는 알 수 없었지만, 악의가 깃든 웃음은 아니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오컬트부실로 돌아왔을 땐, 소녀의 모습을 곧바로 찾을 수 있었다. 유령 소녀는 부실 한편의 의자에 앉아, 테루테루인형을 품에 안은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나: ‘피곤했나 보네…….’ 그나저나, 유령도 꿈을 꿀까? 문득 엉뚱한 고민이 들었지만, 나는 일단 소녀를 깨우기 위해 그녀의 눈앞에 손을 흔들어 보였다. 소녀: “…… 아.” 잠에서 깨어난 소녀는 화들짝 놀란 기색을 보이며 테루테루인형을 움켜쥐었지만, 이내 나라는 것을 깨닫고는 평상시의 그녀로 되돌아갔다. 소녀: “깜빡 잠들어 버렸네요.” 나: “우리 집으로 가자. 피곤하면 거기서 자고.” 부실 밖으로 나오려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소녀가 머뭇대며 발걸음을 옮기지 않고 있었다. 소녀: “저기…….” 우물쭈물하며, 소녀가 내게 말했다. 소녀: “손, 잡아줄 수 있나요……?”